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르됭 전투 (문단 편집) == 1915년말 - 1916년초의 전략적 상황 == 1915년 전역에서 협상국은 서부전선 공세, 동부전선 수세의 전략을 유지했는데 그 전력과 별개로 전황은 영 시원찮았다. 1915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전선을 동쪽으로 밀어내기 위해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실시했으나 독일군의 방어에 막혀 모조리 말아먹고 말았다. 1915년 전역에서 필리프 페탱이 대장으로 진급한 이유가 이 대차게 실패한 공세에서 유일하게 진격에 성공했다는 건데, 그 진격거리가 3~4km다. 즉, 협상국은 1915년 서부전선에서 1년 내내 어떠한 전략적, 전술적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이다. 동부전선에서는 동맹군이 [[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대규모 공세]]에 나서서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러시아령 폴란드]]를 거의 쓸어버리고 전선을 동쪽으로 크게 밀어냈으며 러시아군의 피해는 가공할 수준으로 치솟았다. 지중해 방면 역시 마찬가지로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 측에 가담하면서 [[세르비아 침공|세르비아 전역]]이 전황이 동맹국 측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몬테네그로 왕국]]은 항복했고 [[세르비아 왕국]]은 전 국토를 점령당한 채 망명정부와 함께 잔존병력을 이끌고 [[그리스 왕국]]으로 후퇴했다. 영불연합군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 상륙하여 [[마케도니아]]에서 불가리아군과 대치에 나섰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협상국의 회심의 수였던 [[갈리폴리 전투]]는 대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중동 전선 역시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는 [[바그다드]] 하나 점령 못하고 지지부진했고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에서는 [[수에즈 운하]]를 향한 오스만군의 공세를 막는데에 급급했다. 이 시점에서 협상군에 유일하게 긍정적인 요소는 1915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협상국]]으로 참전했다는 것 하나였다. 캅카스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서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전체적인 전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때문에 1915년말 연합국간 회의를 통해 1916년에도 프랑스와 영국이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치고, 러시아는 방어에 전념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동맹국]]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 건 아니었다. 독일군 역시 지지부진한 서부전선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고 엄연히 열강인 이탈리아가 중립을 깨고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면서 오히려 부담해야 할 전선이 하나 더 늘었다. 동부전선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러시아의 평원은 너무나 넓었고,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격하는 것은 공상 속의 일이었다. 때문에 독일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허황된 것으로 치부했다. 충분히 합리적인 생각인게, 차량화된 25년 후의 독일군이 레닌그라드(페트로그라드의 러시아 혁명 이후 개칭명)까지 진격하고 포위하긴 했는데, 서부전선이 사실상 종료된 상황에서 그조차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군의 허리가 부실해진 소련군을 상대로였다. 서부전선이 유지중인 상황에서, 보병 중심의 군대로 동프로이센에서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격한다는 건 엄청난 무리였다. 단순히 지도에서 거리를 재도 동부전선의 경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페트로그라드까지의 직선거리가 800km가 넘는데, 서부전선의 경우 이미 최전선에서 파리까지 직선거리 200km 이내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즉, 동맹군 입장에서는 동부전선에서의 승리는 허황된 것이었고 현실적으로 서부전선에서 파리를 점령함으로써 프랑스를 이탈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어디까지나 그나마 합리적인 거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가 훨씬 짧은 대신 서부전선의 병력밀도는 동부전선을 훨씬 상회했다. 프랑스는 전국의 병력을 긁어모으고 식민지군까지 동원하여 있는 족족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으며 영국의 대륙원정군도 시시각각 증강되고 있었다. 거리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병력밀도만 놓고 생각하자면 차라리 동부전선에서 기동전으로 러시아군 주력을 포위섬멸하고 페트로그라드를 공략하자는 말이 더 합리적이었다. 즉, 독일군 입장에서는 서부전선을 뚫긴 뚫어어야겠는데 마땅한 묘수가 안나오던 입장이었다. 그리고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개전 이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지역에 주목하게 된다. 베르됭이었다. 베르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육군 최고의 요새 지대로 두오몽과 보 요새 등 오랜 세월동안 만들어진 방어물로 감싸진 지역으로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할 때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프랑스의 자존심이었다. 그렇기에 독일이 공격할 경우 당연히 프랑스군이 저항할 장소였다. 그런데 프랑스군은 공세 준비에 정신이 팔려서 독일군의 베르됭 공략 시도를 포착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독일군이 막대한 병력과 물자, 중포를 베르됭 공격 준비를 위해 은밀하게 코앞까지 옮기는 동안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프랑스군 전열을 가다듬고 1916년의 새로운 공세 준비에 몰두했으며 베르됭 일대는 주전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말았다. 더구나 주전장이 아니었기에 베르됭 지역의 병력과 장비들이 하나둘 차출되어 전투가 개시될 무렵 이 일대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크게 허술해진 상황이었다. 사실 독일군의 보안이 철저하긴 했어도 워낙 대규모 군세가 동원되는지라 몇몇 징후가 사전에 노출되어 대비할 기회가 있긴 했는데 조프르와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일종의 역정보공작으로 판단했다. 때문에 현장지휘관인 정치인 출신 에밀 드리앙 예비역 대령이 방어준비가 허술하다, 독일군의 공세시 막아낼 수 없다, 무언가 심상찮은 징후가 보인다고 몇 달 전부터 보고했지만 조프르는 이를 무시했다. 사실 드리앙 대령은 본래 군 출신으로 군무에 문외한이 아니었으며, 무려 프랑스가 사력을 다해 싸웠던 보불전쟁의 참전용사였던 데다가 전역한 뒤 정계에 진입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개전 후 현역소집되어 부대를 지휘 중이었는데, 보고가 씹히자 열받아서 정식 보고계통이 아닌, 자신의 정치권 인맥을 활용해 동료 국회의원에게 편지를 보내어 언론과 정치권을 통해 조프르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일로 조프르는 '''"정식 지휘계통 외의 보고는 인정하지 않겠다!"'''며 전군에 엄명을 내렸고, 드리앙이 원했던 베르됭 방어력 강화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베르됭 전투 종료 직후 드리앙 대령의 진언을 생깐 게 문제가 되어 조프르도 결국 경질된다.] 오히려 조프르는 솜 공세 등을 위해 베르됭 일대의 요새지대에서 중포 일부를 철거해 재배치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